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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과학으로 푸는 공부의 비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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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영재원 댓글 0건 조회 9,413회 작성일 11-08-30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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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과학으로 푸는 공부의 비밀 (1)  -  

 

 

 


한겨레 자료사진

  

 

 

한 소녀가 우유가 담긴 항아리를 들고 가고 있었다. 소녀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우유를 팔아 달걀을 사야지. 달걀에서 닭을 키워 팔아 드레스를 사야지. 그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가야지.” 단꿈에 빠져 흥겹게 길을 가던 소녀는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우유 항아리는 땅에 떨어져 산산이 부숴지고 만다. 이솝 우화의 한 토막이다.

 

사람이 하는 생각의 12%는 미래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1)  미래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우화 속의 소녀처럼 한 가지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시나리오 사고(scenario thinking)’라 한다. 이 시나리오는 그럴듯하지만 아무 근거가 없다. 그저 희망을 늘어놓은 것뿐이다. 공부와 관련해서도 이런 시나리오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학생들도, 어른들도 우화 속의 소녀와 마찬가지로 우유 항아리를 들고 드레스를 꿈꾼다.

 

 

       지켜지지 않는 공부계획 , 지킬 수 없는 공부계획

 

“공부는 계획적으로”. 어느 공부법을 보더라도 빠지지 않는 말이다. 구글에서 ‘공부 계획’이란 말로 찾아보면 5백만 건이 넘는 문서가 검색된다. 학생들도 공부 계획은 열심히 세운다. 방학이 되면 어느 어느 책을 떼겠다고, 시험이 다가오면 시험 공부를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계획을 세우지만, 이런 계획은 지켜지지 않고 학생들은 나약한 의지를 탓하며 좌절한다.

 

하지만 공부 계획이 지켜지지 않는 건 의지 부족 때문만이 아니다. 애초에 계획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훨씬 더 빨리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계획 오류(planning fallacy)’라고 한다. 무리한 계획을 세웠으니 지켜질 리가 없다.

 

해외 대학 중에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우등 졸업논문(honors thesis)을 쓸 기회를 주는 학교들이 있다. 캐나다 심리학자 뷀러(Buehler)와 그의 동료들은 우등 졸업논문을 쓰는 학생들에게 며칠이면 논문을 마칠 수 있을지 물어보았다. 학생들은 평균적으로 33일이면 다 쓸 수 있을 거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학생들이 실제로 논문을 마치는 데에는 평균 55일이 걸렸다.2)

 

이 학생들은 그 대학에서 가장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이었다. 그러니 의지가 부족하거나 능력이 없어서 논문이 늦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애초에 55일 걸릴 일을 33일 안에 해내겠다고 한 것이 무리였다. 그러면 이 학생들은 왜 이렇게 무리한 계획을 세웠을까?

 

 

 

      무리한 계획을 세우는 이유들…

 

뷀러와 동료들은 그 이유를 밝히기 위해 다른 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았다. 그 중 한 실험에서는 학생들에게 학교 과제에 대한 계획을 세우게 하고, 계획을 세우는 동안에 머리 속에 떠오르는 내용을 크게 말하도록 하였다. 학생들이 말한 내용을 분석해보니 “화요일에 될수록 많이 하고, 못한 부분은 수요일에 마쳐야지”와 같이 미래의 계획들이 전체의 71%를 차지했다. 반면, 자신의 경험(”이 수업에서 다른 보고서를 쓸 때에도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이나 다른 사람의 경험(”내 친구들은 11시30분까진 끝냈지”)은 각각 6%와 1%에 불과했다. 학생들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겪은 과거의 적절한 경험을 떠올려서 이를 토대로 실천할 수 있는 계획을 짜는 게 아니라, 우화 속의 소녀처럼 근거 없는 시나리오만 짰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학생들은 적절한 경험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미래에만 주의가 팔려서 과거를 생각하기 어렵기도 하고, 과거의 경험을 어떻게 참고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나는 남과 다르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경험을 무시해서 그렇기도 하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가 남보다 오래 살고, 건강하며, 돈도 더 많이 벌 거라고 예상한다.3) 또한 자동차 운전자 중에 90%가, 대학교수의 94%가 자기들이 평균적인 운전자나 교수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보통 평균이 중간쯤 된다는 걸 생각해보면, 대단한 과신이다. 그러니 다른 학생들이 논문을 쓰는 데 두 달 가까이 걸리는 걸 보더라도, 자신만은 한 달이면 충분히 쓸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된다.

  

공부 계획을 잘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심리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실험해 보았다. 과거의 경험을 떠올려보거나,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만들게도 해보고, 계획을 작은 부분들로 나누어 자세히 세우게 해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도 했다. 하지만 어떤 실험에서는 효과가 있는 걸로 나온 방법이 다른 실험에서는 효과가 없기도 했다. 왜냐하면 애초에 기억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경험을 활용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4)

 

따라서 공부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스스로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하루에 8시간 공부하겠다고 마음 먹기 전에 하루에 자신이 몇 시간이나 공부하는지 기록하고, 한 시간에 문제집을 10쪽 풀겠다고 계획하기보다 문제집 한 쪽 푸는 데 걸리는 시간을 재는 게 먼저다. 데이터가 있어야 예측도 할 수 있다.

 

 

 

     이념 깃든 장밋빛 교육담론… 근거없는 영어공용화 시나리오

 

공부에 대해 장밋빛 시나리오를 남발하는 건 학생들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에 대한 담론들을 살펴보면 이념과 희망사항만 있을 뿐 아무런 현실성이 없는 주장들이 적지 않다. 

 

1998년 소설가 복거일은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라는 책을 통해 한국어를 버리고 영어를 모국어로 삼기 위해 영어와 한국어를 함께 쓰는 영어공용화를 하자는 대담한 주장을 내놓았다. 한국어 따위보다 영어가 훨씬 쓸모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념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실용적 가치보다 민족어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한 가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의 논쟁은 주로 이런 가치들을 두고 벌어졌다.

 

영어공용화론을 둘러싼 논란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초기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국어와 국사까지 영어로 수업하는 ‘영어몰입교육’을 추진하다가 영어공용화를 하자는 것이냐는 비판에 이를 번복하고 말았다.

 

 그런데 영어공용화론도 사실은 그럴듯하지만 아무 근거가 없는 시나리오일 뿐이다. 우유를 팔아 달걀을 사고 닭을 키워 드레스를 사듯, 영어를 공용어로 삼고 사람들이 영어를 잘 하게 되면 영어를 모국어로 쓰자는 것뿐이다. 시나리오도 이런 3류 시나리오가 없다. 이런 주장을 두고 설왕설래 할 필요도 없는 게, 현실적으로 전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언어를 가르치는 대로 배우지 않는다. 인간은 선천적인 언어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서, 주변의 언어를 듣고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모국어는 학습(learning)이 아니라 습득(acquisition)된다고 말한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혼성어(creole)다. 이민자 사회와 같이 제대로 된 언어가 없이 여러 언어가 뒤죽박죽 쓰이는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그 속에서도 완전한 문법을 갖춘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낸다. 하와이 혼성어나 니카라과 관용수화는 이렇게 단 한 세대만에 생겨났다.

 

영어를 공용어로 하면 아이들이 저절로 영어를 잘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순진하기 짝이 없다. 실제로 영어 공용화 정책을 펼친 싱가포르의 경험을 보자. 싱가포르는 다민족 사회인 데다 오랫동안 영국 식민지였다. 한국보다 영어공용화를 할 이유도 있고, 조건도 좋았지만 ‘싱글리시(Singlish)’라는 영어, 말레이어, 중국어가 뒤섞인 혼성어(creole)가 만들어졌다.

 

백 년 전 일본에서도 모리 아리노리(森 有禮, 1847~89)가 일본어를 버리고 영어를 국어로 삼자는 주장을 내놓은 적이 있다. 역시나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기각되고 말았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일본 안에서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으로 나눠져 의사소통만 안될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
어륀지'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냈던 이경숙 당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장. 2007년 12월 한겨레 자료사진

   

  

‘어륀지!’의 희망사항과 ’깨진 항아리’ 우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주요 인사들도 복거일과 마찬가지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댔다. 이경숙 위원장은 미국에서 “오렌지”라고 하면 미국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며 외래어 표기법을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글을 영어 발음에 가깝게 쓰면, 사람들의 영어 발음이 좋아질 거라는 시나리오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도 근거 없긴 마찬가지다. 외래어표기법을 어떻게 바꾸더라도 영어 발음을 한국어로 적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렌지’와 ‘orange’는 음절 수도, 강세도 다르고 r과 ㄹ 만이 아니라 o와 ㅗ, g와 ㅈ을 포함해 거의 모든 발음이 다르다. 그럼 한글을 모두 영어식으로 발음할 셈인가? 그러면 ㄱ, ㅋ, ㄲ의 구분을 포기해야 한다. 영어 발음을 잘하려면, 발음기호를 보고 발음 연습을 해야지 한글을 보고 영어발음을 잘하겠다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사람마다 공부하는 목적도 교육에 대한 이념도 다를 수 있다. 이것은 과학이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가르치고 배우는 방법은 과학적으로 다룰 수 있다. 경험과 과학 없이 희망과 이념만 있는 공부는 우화 속의 우유 항아리처럼 산산이 깨어져버릴 것이다. 앞으로 이 연재에서는 공부와 교육에 대해 한국 사회에 널려 퍼져 있는 근거 없는 시나리오들을 살펴보고, 언어학, 심리학, 신경과학 등 인지과학으로 이러한 오해와 신화를 풀어보려고 한다. 공부와 교육에 관심이 없는 독자들에게도 지적으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이다.


>본 기사는  에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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